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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회(?)

작성자
김원웅
작성일
2019-04-05 14:58:05
조회
85
붕어회(?)
 
어릴 적 추억이다.
부모님이 남포등을 들고 밤길을 나서신다.
“엄마 으디가요?”
“응 붕어회 간다”
엄마의 발음은 분명 붕어회였다.
“무슨 붕어회라우?”라고 여쭈어야하는데 그냥 혼자 생각했다.
아, 붕어회를 드시는 곳이 있구나. 그곳에 가시는구나.
얼마 시간이 지난 후 후 또 남포등을 들고 밤길을 나서신다.
“엄마 으디가요?”
“응 붕어회 간다.”
“저도 가고 싶은디, 엄마 저도 데려 가쑈야.”
졸라서 밤길을 따라 나섰다.
발걸음이 닫는 곳은 이웃 마을교회였다.
그 교회에서는 멀리 서울에서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 중이였다.
엄마가 남포등을 들고 밤에 나서신 길은 ‘붕어회’(?)를
드시러간 것이 아닌 ‘부흥회’에 참석하신 것이었다.
부흥집회에 참석하고 나서야 “붕어회(?)”가 아닌 ‘부흥회’임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도 부흥성회가 열리면 어머니는 저를 집회에 데리고 다니셨다.
열린 집회마다 교회당 앉을 자리는 늘 부족했다.
고향 섬마을에는 교회가 12개 있었다.
거의 마을에 하나 꼴로 교회가 세워져있었다.
소시 적 기억으로는 제 부모님을 비롯해서
고향교회 성도들은 ‘붕어회’(?)를 참 좋아했다.
 
한국교회의 부흥은 세계교회의 관심사였다.
선교역사상 100여년 만에 인구의 20%이상
복음 화 된 나라는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다각도로 연구가 진행되었고 교회부흥에 대한 여러 진단들이 있다.
필자 나름대로 진단해 보건데 이 땅의 교회부흥은 한마디로 ‘사모함’이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참 사모함이 컸다.
 
기록에 의하면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한참 일어날 때
목포에서 한 여자 성도가 자신이 먹을 식량을 머리에 이고
한 달을 넘게 걸어서 평양 장대현교회 집회에 참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얼마나 사모함이 컸으면 그렇게 했겠는가?
평양대부흥운동의 동력은 전적으로 사모함이었다.
 
20대 초반 섬기던 교회에서 부흥성회가 열렸다.
그 집회 타이틀은 ‘심령 대 부흥성회’였다.
오늘처럼 드럼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찬양을 뜨겁게 하기 위해 동원된 최고의 악기는 큰 북이었다.
큰 북을 서로 치겠다고 청년들 사이에서 경쟁이 붙었다.
어찌하다 제가 그 북 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무릎을 꿇고 두렵고 떨림으로 북을 쳤다.
그 집회에서 은혜를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은 바로 저였다.
북치는 것이 무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경쟁이 붙었던지...
 
80년대 신학교시절 거의 매년 한 차례 이상
오산리 금식기도원에서 금식기도를 했다.
오산리 금식 기도원에 오를 때마다 경험했던 것은
매번 기도하는 사람들로 그 큰 기도원이 발 디딜 틈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큰 본당 홀에 노른자 자리를 잡은 소위 ‘은혜 사모파’들은 집회 내내
그 자리를 고수하며 요지부동이었다.
기도원 측에서 자리순환을 위해 청소를 핑계 삼아
깔아놓은 자리를 옮기라고 했었다.
그러면 짐을 들고 문 앞에서 청소가 끝나기를 수 백 명이 기다렸었다.
청소가 끝나 문이 열리면 100m달리기 선수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은혜의 노른자 자리 금(金) 자리(?) 쟁탈전이 벌어졌다.
사모함이 정말로 컸었다.
 
어느 시점부턴가 한국교회가 부흥이 멈췄다.
한국교회 앞에 많은 사람들이 백가쟁명식 분석과 처방을 내놓았다.
분석도 있었고 처방도 있었지만 극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성령님의 역사가 힘을 잃은 것도 아닌데
교회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문제는 사모함이 사라진 것이다.
한국교회는 부흥할 수 없는 최악의 조건 속에서 부흥을 했다.
좋은 건물을 갖추지 못했고 교육학적 세련된 가르침도 없었다.
그렇다고 지도자들의 배움 또한 탁월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교회는 폭발적 부흥이 일어났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모함 때문이었다.
은혜를 받고야 말겠다는 사모함이 모든 것을 극복했다.
 
느헤미야서는 그 주제가 ‘재건’이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야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었다.
상당히 높은 지위이다. 오늘 날로 말하면 비서실장쯤 된다.
그가 왕의 허락을 받아 이스라엘백성들과 함께 제3차 포로귀환을 하게 된다.
예루살렘에 돌아 온 그의 최대사명은 무너져버린 예루살렘성벽 재건과
이스라엘백성공동체의 하나님백성공동체로서 재건이었다.
방해 세력들이 있었지만 그들을 물리치고 52일 만에 성벽을 재건했다.
성벽을 재건한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으로 불러 모았다.
모든 백성들이 광장에 모였다.
그때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하기시작 했다.
백성들은 모두가 감히 앉아서 말씀을 들을 수 없어서
하나같이 새벽부터 정오까지 서서 말씀을 들었다.
아멘 아멘하며 말씀에 반응하였다.
그리고 가슴을 찢으며 기도하였다.
무너진 이스라엘백성공동체가 하나님백성공동체로 회복이 되었다.
그들의 사모함이 성벽재건과 영적부흥을 가져왔다.
 
시인의 고백처럼 사월은 잔인한 달이다.
신앙의 잔인한 계절이 왔다.
생명 싹 틔우기에 사월 바람은 너무 세다.
오월 초록 들판 만들어 놓고야 말겠다는 사모함이
사월의 잔인한 계절을 이겨낼 수 있다.
우리는 푸르른 그리스도의 계절을 이 땅에 반드시 가져와야한다.
우리의 후손과 조국과 열방을 위해서...
 
이 땅 어머니들이 들었던 남포등을 다시 들어야하지 않겠는가?
붕어회(?)를 먹으러.
성전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은혜의 노른자 금(金)자리’를 차지하기위해서
죽을힘을 다해 뛰어가 봐야 하지 않겠는가?
무너져가는 잔인한 신앙의 계절을 이기기 위해서.
사모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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